비와호 수로란

Story

소개

수량이 풍부한 비와호의 물을 교토로 나르는 ‘비와호 수로’는
시가현 오쓰시 간논지에서 교토부 교토시 후시미구 호리즈메초까지 총 길이 약 20km의 ‘제1수로’,
제1수로 북측에 전체를 터널로 나란히 건설한 총 길이 약 7.4km의 ‘제2수로’,
교토시 사쿄구 게아게 부근에서 분기하여 기타시라카와에 이르는 총 길이 약 3.3km의 ‘수로 분선’ 등으로 구성됩니다.
메이지 시대에 준공된 이후 지금도 여전히 ‘현역’으로 활약하는 인공 운하입니다.

Story1

교토와 오쓰를 잇는 ‘희망의 수로’

The Lake Biwa Canal and The Lake Biwa Canal Cruise: Create varied impressions in each season
사시사철의 표정을 보여주는 비와호 수로와 ‘비와호 수로선’

헤이안쿄 이래 천년 이상에 걸쳐 일본의 수도였던 교토는 메이지 유신 이후 사실상의 도쿄 천도로 인해 인구가 약 3분의 1로 감소하고, “언젠가 여우와 너구리가 살게 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저 한탄만 한 게 아니라, 교토와 오쓰를 잇는 ‘희망의 수로’, 비와호 수로 건설에 도시 재생의 희망을 걸었습니다.

메이지 14(1881)년에 제3대 교토부 지사로 취임한 기타가키 구니미치는 비와호에서 끌어온 수로의 수력을 이용하여 새로운 공장을 세우고, 주운을 활용한 활발한 물자 수송을 계획했습니다.

당시의 교토부 연간 예산의 약 두 배에 해당하는 막대한 공사비가 들어가는 전대미문의 대사업에 당시 최신 기술과 지식을 배운 젊은 재능이 발탁되었습니다. 공부대학교(현재 도쿄대학 공학부 전신의 하나)를 갓 졸업한 다나베 사쿠로(당시 21세)를 공사 담당자로 발탁하고, 서양의 측량술을 배워 실적을 쌓고 있었던 시마다 도세(당시 33세)가 정밀한 측량도를 작성하여, 메이지 18(1885)년에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활약한 인물 소개

  • Kunimichi Kitagaki

    기타가키 구니미치
    덴포 7(1836)년~다이쇼 5(1916)년

    제3대 교토부 지사. 메이지 유신 이후, 쇠퇴한 교토의 산업을 부흥시키기 위해 다양한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여 큰 공적을 남겼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비와호 수로 계획과 건설입니다. 그 외에 교토상공회의소 설립, 교토-미야즈 구간 도로 건설, 제3고등학교의 유치 등이 있습니다.

  • Sakuro Tanabe
    [다나베 일가 자료]

    다나베 사쿠로
    분큐 원(1861)년~쇼와 19(1944)년

    비와호 수로 건설 공사의 주임 기사로 기타가키 지사가 등용한 인물. 비와호 수로 공사에 관여하게 된 시기는 수로에 관한 졸업논문을 작성하고 공부대학교(현재 도쿄대학 공학부 전신의 하나)를 갓 졸업한 21세 때였다. 홋카이도 관설철도 건설 등 메이지 시대의 다양한 토목사업에서도 활약했으며 일본의 근대산업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 Dosei Shimada

    시마다 도세
    가에이 2(1849)년~다이쇼 14(1925)년

    측량기사. 홋카이도의 개척사 가학교에서 미국인 기술자한테 측량기술을 배웠다. ‘비와호 수리 의견서’에서 책정된 구역을 정밀하게 측량하여 ‘계획실측도’를 작성. 수로사무소의 측량부장으로 취임하여 다나베 사쿠로와 함께 수로공사에서 활약했다.

Prospectus for survey map for the canal through Lake Biwa in Oumi District in Shiga Prefecture to Kyoto

시가현 오미노쿠니에서 비와호에 이르는 교토 통수로 계획실측도
(메이지 16(1883)년 4월쯤, 시마다 도세이 필)

시마다는 오쓰에서 교토까지의 지형을 정밀하게 측량 및 조사하여, 삼각측량이라고 불리는 방법으로 이 실측도를 작성했다.

하지만 공사는 가혹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단단한 암반을 다이너마이트로 파쇄하고, 곡괭이로 땅을 파서 손에 든 바구니로 나르는 등 모든 작업을 인력으로 해결했습니다. 터널 내부에서는 간델라의 희미한 불빛으로 작업을 진행하고, 증기식 펌프로 물을 배출했습니다.

대부분의 자재를 자급자족으로 조달했으며, 밤에 기술자를 양성하고 낮에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방식으로 노력을 거듭했습니다.

공사는 무려 400만명의 작업원을 동원하고, 일본 최초로 수직갱도(수갱=샤프트)를 이용한 터널 굴착공법을 채용하는 등 기술적으로 궁리하면서 진행되었습니다. 터널을 굴착하는 과정에서 쏟아져 나오는 대량의 지하수 등 많은 문제에 시달리면서, 약 5년에 걸친 난공사 끝에 메이지 23(1890)년, 제1수로가 완성했습니다. 그 시절 일본에서 진행되는 대규모 토목공사는 외국인 기술자에게 설계 감독을 맡기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비와호 수로 건설은 설계부터 시공까지 모든 공정을 일본인의 손으로 이뤄낸 최초의 사례가 되었습니다.

The First Shaft
제1수직갱도 (샤프트)
The Second Shaft
제2수직갱도 (샤프트)

제1수직갱도와 제2수직갱도

산 위에서 수직으로 굴을 파 내려가, 도달점에서 산의 양측을 향해 굴착 공사를 진행하는 수직갱 공법이 시공기간 단축을 위해 터널 공사로서는 일본 최초로 제1터널 건설에서 채용되었다.

Longitudinal section of the First Canal

제1수로 종단면도

산을 뚫고 산허리를 완만하게 둘러 흐르는 수로는 완벽하게 계산된 흐름이기도 하다.

제1수로의 완성을 계기로, 쇠퇴한 교토 지역은 부흥의 길을 힘차게 걷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수로변을 걷다 보면, 당시의 위인들이 휘필한 현판을 각 터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편액의 석판에 새겨진 글은 비와호 수로가 일본의 일대 프로젝트였다는 것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Plaques on the tunnel entrances convey writer’s passion to us
Hirofumi Ito Plaques on the tunnel entrances convey writer’s passion to us
Hirofumi Ito
Plaques on the tunnel entrances convey writer’s passion to us
Aritomo Yamagata Plaques on the tunnel entrances convey writer’s passion to us
Aritomo Yamagata
터널의 편액이 휘호자의 생각을 말하다
(좌) 이토 히로후미, (우) 야마가타 아리토모
Story2

생활과 도시를 크게 발전시킨 수력발전

제1수로에서 흘러 보낸 물은 수차 동력이나 주운, 관개, 방화, 정원용수 등 많은 목적으로 이용되었는데, 사람들의 생활을 가장 크게 바꾼 것은 당시 최첨단 기술이었던 수력발전입니다.

당초에 비와호 수로는 수차 동력에 이용될 계획이었으나, 공사 도중에 다나베 사쿠로가 실업가 다카기 분페이와 함께 수력 이용을 시찰하러 미국을 방문했습니다. 두 사람은 콜로라도주 아스펜의 수력발전을 시찰하는 과정에 큰 영감을 얻었습니다. 귀국 후 다나베는 기타가키 지사를 열심히 설득하여, 공사 도중에 수력발전을 실용화하기로 용단을 내렸습니다. 메이지 24(1891)년에 게아게에서 일본 최초의 일반공급용 수력발전소가 가동하자, 도시에 전기가 송전되어 전등을 밝혀 기계를 움직이는 동력으로 이용되었습니다.

Keage Power Plant (first construction period) [Provided by the Tanabe Family]
제1기 게아게 발전소 외관 [다나베 일가 자료]
Water pipe to the Keage Power Plant (first construction period) [Provided by the Tanabe Family]
제1기 게아게 발전소로의 송수철관 [다나베 일가 자료]

수력을 이용한 저렴하고 풍부한 전력에 의해 교토의 중소공장에서 기계화가 가속화되었고, 일본 최초의 전기철도 영업이 시작했습니다.

전력 수요가 가파르게 늘어나면서 교토의 경제와 산업이 발전했으며, 산업의 진흥은 그 후의 공학 및 과학 발전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아울러, 의료나 오락에도 전기가 활용되어 사람들의 생활문화 향상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전력 출력을 증강하기 위해 메이지 45(1912)년에 완성된 제2기 게아게 발전소는 현재도 게아게에 남아 있으며, 교토의 생활과 도시를 크게 발전시킨 다대한 공적을 지금까지 전하고 있습니다.

Keage Power Plant (second construction period)
Promoted the development of Kyoto
도시의 발전을 지탱한 제2기 게아게 발전소
Story3

비와호와 오사카를 연결한 주운

요도가와에 이르는 제1수로의 완성으로, 오쓰에서 교토를 거쳐 오사카에 이르는 주운의 길이 열렸습니다. 그리하여 쌀, 숯, 목재, 석재 등을 배로 운반할 수 있게 되어 물류가 확대됨으로써 경제와 산업이 더욱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운수와 더불어, 관광객을 태운 유람선이 오가는 명소로도 주목받게 되었습니다.

Keage Boat Reservoir [Provided by the Tanabe Family]
게아게 선박지 [다나베 일가 자료]
Story4

방화용수와 일본 굴지의 근대정원군

비와호 수로의 물은 교토 고쇼 및 히가시혼간지 등의 시설을 지키는 방화용수로도 활용되었습니다. 게아게 수로변에 건설된 구 고쇼 수도 펌프실은 예전에 교토 고쇼를 화재에서 지키기 위한 시설로 사용되었으며, 지금도 그 중후감 있는 디자인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국지정 등록 유형문화재)

The Former Imperial Palace Water Pump Station
구 고쇼 수도 펌프실

또한 비와호 수로의 물에 의해 오카자키 지역에 문화적 경관이 형성되었습니다. 근대 최고봉의 정원가 우에지의 7대째 명장인 오가와 지헤의 손으로 수로의 물을 이용한 정원이 만들어졌으며, 일본 굴지의 근대정원군을 개화시켰습니다. 제3대・9대 내각총리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교토의 거처로 활용한 무린안은 메이지 시대를 대표하는 근대 일본 정원의 걸작입니다. 헤이안 진구 신엔의 연못에는 비와호의 물이 흘러 들어오는데, 원래 비와호에서 서식했으나 환경 변화로 인해 확인이 어려워진 멸종위기종인 줄납자루가 서식하고 있습니다.

The Beautiful garden at Murin-an (© UEYAKATO LANDSCAPE Co., Ltd)
명승 무린안 정원 ©우에야카토조엔
Story5

게아아게 정수장에서 안전・안심의 수돗물을 공급

메이지 20년대 후반에 들어서자 제1수로의 유량으로는 매년 증대하는 전력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게 되었고, 콜레라 및 장티푸스 등의 전염병이 만연하면서 지하수 의존의 식수에 질적・양적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러던 중 다나베 사쿠로의 진언을 받은 초대 교토시장 나이키 진자부로가 제2수로 건설에 대한 구상을 밝혔습니다.

구상이 실현되기 전에 나이키의 임기가 끝났지만, 그 구상을 제2대 교토시장 사이고 기쿠지로가 이어받아, 사이고는 교토시 3대사업(제2 비와호 수로 건설・상수도 포설・도로확장 및 시영전차 부설)의 실현을 위해 분주하게 일했습니다. 제2수로는 그 사업의 핵심으로 메이지 41(1908)년 10월에 착공, 메이지 45(1912)년 3월, 제3대 교토시장 가와카미 지카하루 재임시에 완성했습니다.

제2수로의 유량은 매초 15.3㎥이며, 오쓰시 간논지를 시점으로 하여 제1수로의 북쪽에 나란히 건설되었습니다. 상수도 수원으로 이용하는 데 있어서 오염을 막기 위해 전체를 굴착 터널 또는 철근 콘크리트관 매립 터널로 설계했으며, 총 길이 약 7.4km의 물길은 게아게에서 제1수로와 합류합니다.

이렇게 더 풍부한 물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을 계기로 그 수자원을 상수도로 이용하기 위해, 제2수로와 동시에 일본 최초로 ‘급속 여과’ 방식을 채용한 게아게 정수장을 완성했습니다. 그리고 완성한 다음 달(메이지 45(1912)년 4월)에는 게아게 정수장에서 수돗물 공급을 시작했습니다.

활약한 인물 소개

  • Jinzaburo Naiki

    나이키 진자부로
    가에이 원(1848)년~다이쇼 15(1926)년

    초대 교토시장. 메이지 22(1889)년부터 시회의원을 역임하면서 교토직물회사, 교토상공은행 등의 창설에 관여한 실업가였다. 히가시야마 풍치 보존과 산업 진흥, 하수도 포설, 도로 증축 및 제2수로 건설 등 교토를 인구 50만명 이상의 도시로 발전시키기 위한 도시정비 구상을 발표했다.

  • Kikujiro Saigo

    사이고 기쿠지로
    만엔 2(1861)년~쇼와 3(1928)년

    사이고 다카모리의 장남으로 메이지 37(1904)년 10월 제2대 교토시장으로 당선되었다. 메이지 44(1911)년 7월까지의 재임기간에 많은 사업을 지휘했는데, 특히 교토시 3대사업은 교토의 근대화를 위한 기초가 되었다. “이 사업은 도시 백 년의 기초를 세우는 것이다. 후세 자손들의 행복을 위해 지금은 견디고 우리가 완성해야 한다”고 호소하며 굳은 결의를 나타냈다고 한다.

  • Chikaharu Kawakami

    가와카미 지카하루
    안세이 2(1855)년~쇼와 19(1944)년

    제3대 교토시장. 그의 재임 중에 제2수로가 완성했다.

수돗물의 공급확대
Filtration facility at Keage Filtration Plant (1912)
게아게 정수장 여과장 내부 (메이지 45(1912)년)

수도 창설 당시, 교토시의 인구 약 50만명 중 급수 인구는 약 4만명으로 보급률은 8% 정도였습니다. 그 후 이용자의 물 사용량 증대에 대응하기 위해 다이쇼 말엽부터 헤이세이까지 8차례에 걸친 확장사업을 시행하여 현재 보급률은 99%를 넘어섰습니다.

교토의 생활을 지키는 수도・하수도
First high service reservoir at Keage Filtration Plant
게아게 정수장의 제1고구배수지

비와호 수로 발전의 역사 속에서 실현된 수도・하수도는 24시간 365일 지금도 쉬지 않고 일상생활을 지키며 교토의 경제, 산업, 문화 등 도시의 활동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철쭉의 명소
約4,900本のつつじが咲き誇る
약 4,900 그루의 철쭉이 피어나다

교토 수도사업의 발상지인 게아게 정수장에서는 매년 시설의 일반 공개 행사가 열리며 ‘철쭉의 명소’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Story6

시간을 넘어 지금도 살아 숨쉬는 비와호 수로

비와호 수로는 일본의 근대화를 전하는 소중한 산업 유산이며, 비와호 수로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교토의 도시 모습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현재도 비와호 수로는 수도용수, 발전용수, 관개용수, 공업용수 등을 공급하며 다양한 도시활동을 지탱하는 중요한 도시기반시설입니다.

난젠지 선박지 부근에 있는 비와호 수로 기념관에는 수로 건설에 관한 당시의 다양한 자료와 실물이 수많이 전시되어 비와호 수로의 역사와 역할에 대해 즐겁게 배울 수 있습니다.

The Lake Biwa Canal Museum
비와호 수로 기념관

헤이세이 8(1996)년에 제1수로 관련시설 12곳이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헤이세이 19(2007)년에는 비와호 수로・비와호 수로 기념관 소장품・난젠지 수로각・ 게아게 인클라인・게아게 정수장・게아게 발전소가 경제산업성에 의해 근대화 산업유산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또한 육상교통의 발달과 전쟁의 영향으로 쇼와 26(1951)년에 끊긴 주운이 헤이세이 30(2018)년, 약 70년만에 관광선으로 되살아났습니다. 이 ‘비와호 수로선’은 오쓰에서 게아게에 이르는 제1수로를 부드럽게 나아가며, 비와호 수로의 매력을 가까이 느낄 수 있습니다.

또한 레이와 2(2020)년 6월에 비와호 수로는 ‘교토와 오쓰를 잇는 희망의 수로 비와호 수로 ~배를 타고, 걸어서 만나는 메이지의 한때’라는 스토리로 일본유산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교토를 재생과 비약으로 이끌어 오늘의 도시 모습이 형성되기까지 큰 역할을 한 비와호 수로는 지금도 여전히 교토와 오쓰를 연결하고, 도시와 생활을 윤택하게 하고 있습니다. 비와호 수로의 부드러운 물의 흐름을 ‘비와호 수로선’에서 유람하거나, 사시사철의 모습을 보여주는 수로 연선과 시설을 산책하다 보면, 메이지 시대에 도시재생의 희망을 품고 역경과 고난을 극복한 이 장대한 사업이 시간을 넘어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Nanzenji suirokaku
비와호 수로선
Philosophers’ path
철학의 길